미사여구가 많고 화려한 글보다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글을 좋아합니다. 그 안에 저자의 삶과 지식이 함께 녹아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요즘 전문 작가가 아닌 연구자, 과학자가 쓴 에세이를 자주 읽는 것이 바로 그 이유라고 생각해요.
잘 설명된 과학 이야기’가 아니라 지식과 삶, 상실과 선택을 하나로 뭉쳐 천천히 빚어올린 도자기 같은 기록-
형태는 단단하지만, 표면에는 손자국이 남아 있지요.이론만으로는 만들 수 없고, 삶을 통째로 밀어 넣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글이 가득한 책을 4권 골라봤습니다.

수학의 위로 — 마이클 프레임 /디플롯

노년의 수학자가 자신의 삶을 되짚으며 쓴 자서전이자 에세이집입니다.
저자는 수학을 정답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에게 수학은 상실 이후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시선이지요. 어머니를 잃은 뒤, 그는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기하학의 점과 선, 면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서 무너진 균형과 다시 만들어지는 질서를 관찰합니다.
수학은 슬픔을 치유하지 않아요. 하지만 슬픔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하지요.
이 책은 그 구조를 따라가며 상실 이후에도 사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 읽고나면 저자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계시기를 자연스럽게 빌게 됩니다. (아, 좋아하는 출판사, 디플롯을 알게된 책도 이 책이네요)
수학은 답을 주기보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랩걸 — 호프 자런

"여자가 과학자가 되겠어?" 라는 선입견을 견면서 살아온 열정적인 생물학자의 기록입니다.
이 책은 발견의 순간보다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더 많이 다뤄요 생각보다 과학자의 하루는 아이디어보다 몸의 노동에 가깝습니다. 특히나 저자는 '식물학자'로 유독 더 그렇습니다. 흙을 만지고, 실패를 반복하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오죠.
결과를 내고 연구비를 타내고 다시 연구를 하는 삶속에 지식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기 몸으로 증명하면서 과학은 성취가 아니라 버티는 시간 위에 천천히 쌓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자라는 직업보다 과학자로 살아가는 생활에 가깝습니다.
식물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해낸다.
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 — 피터 스콧-모건

성소수자로, 뇌과학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저자는 루게릭병 진단 이후 시간을 늘리는 대신 자신의 존재 방식을 다시 설계합니다. AI와 기계 장치를 자신의 몸에 결합하는 과정은 기술 실험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선택이지요.
그에게 기술은 감정을 지우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형태였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미래를 논하기보다 죽음을 앞둔 한 과학자가 자기 삶의 마지막 구조를 직접 만들어가는 기록입니다.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자는 2022년에 별세했습니다)
나는 죽음에 맞서 싸우기로 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나로 남기로 했다.
뜻밖의 것의 단순한 아름다움 — 마르셀로 글레이서

과학자이지만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에세이집인데요, 꽤나 다방면의 지식이 함유되어있어 읽고나면 포만감이 가득해집니다.
저자는 과학에서 완벽한 답을 찾지 않습니다. 그가 붙잡는 것은 공식과 질서 사이에 남아 있는 여백이지요.
설명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불완전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이 책은 이해의 완성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머무를 수 있는 태도, 그 자체가 과학자의 윤리임을 보여줍니다.
우주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바로 그 점이 아름답다.
진리를 탐구해왔던 일생, 그리고 그 안에 오롯이 들어 있는 저자의 삶.
정리하며 한 권 한 권을 다시 떠올려 보니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책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개해드린 책 가운데 읽어보신 책이 있으신가요?
4 권 모두 이과적 지식이 전혀 없어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과학자가 쓴 에세이 한 권을 골라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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